2007년 11월 13일
오늘의 나는 부자입니다
대학을 다닐때도 줄곧 그랬지만 몇년전부터 부모님께선 내게 따로 용돈을 주지 않았다. 나 역시도 꼭 필요한 돈이 아니면 굳이 용돈을 달라고 말할 필요가 없었다. 명절 즈음 친척분들께 건네받은 쌈짓돈이 통장에 고스란히 남아있었으니까. 그게 아니더라도 내가 돈이 필요하다고 말을 했다면 돈을 주었겠지만 별 필요가 없었다. 사실 돈 쓸 일이 거의 없으니까. 사실 문화생활을 거의 접하지 못하고 산다. 영화나 특별한 유행 등. 나는 전혀 부끄럽지 않지만 (농담삼아 친구들과 서로 아.. 부끄러워라.. 하고 말하곤 한다) 가끔씩 유상무상한 사람들이 어떻게 아직 무엇무엇도 안 봤냐고 말을 건네곤 할 때, 난 돈이 없어서 그렇다며 피식 웃곤 했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 그 뒤로는 말을 잘 걸지 않더라. ;;
아무튼 그 와중에 나름 적은 돈을 열심히 모아 한 2백만원 정도를 손에 들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집안에 큰 일이 생겼고 돈이 급한 엄마는 급기야 내게 돈 있으면 좀 내놓으라고 (종종 모자간의 비합법적인 거래가 발생하곤 한다) 하셨다. 그때 거의 모은 돈의 대부분을 넘겨주었던가. 대충 170 정도를 주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남은 돈으로 근근이 먹고 살면서 그 돈 언제쯤 상환해 주려나 하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이쿠. 훨씬 더 큰 일이 터져버렸다.
이제까지 정정하진 않으셨어도 편안하게 살아오시던 할머니에게 큰 변고가 닥쳤다. 어느날 갑자기 코피를 흘리시더니 자꾸 피가 멎지 않길래 시골서 대구 모 병원까지 모셔왔었다고 한다. 노령으로 인한 몸의 이상인줄만 알았는데 의사는 전혀 다른 진단을 내렸다. cancer. 부모님과 친척분들은 당사자에게 비밀로 하려고 했지만 가실 때를 직감했는지 할머니께선 눈치를 채고 있는 듯 했다. 그러면서 통원치료비, 수술비, 약값 등 꽤나 많은 비용이 들었다. 친척들은 각지에 퍼져 살고, 지금까지는 시골에서 작은아버지댁과 함께 사시던 할머니는 어제를 기점으로 대구 칠곡에 있는 요양병원으로 들어가셨다. 우리집으로 모셔오려 했는데 몸상태가 워낙 악화되어 지속적인 치료가 필요하시므로 집에는 오실 수 없다고 했다. 이런 상황을 겪었다. 보통은 어떨까, 슬프다는 생각을 하면서 눈물을 글썽일지 모르겠지만 나와 우리 엄마에게 찾아온 감정은 안쓰러움이었다. 할머니께서 오래 사시기를 바라지 않는다. 누릴 부귀영화도 없고 더이상 살아서 득... 이라 해야하나 무슨 좋은 일을 보겠다고. 다만 고통 없이 편안하게 가시기만을 바라기에 엄마와 나는 둘이서 그렇게 안쓰러워했다. 할아버지를 그렇게 일찍 보내시고 살아오며 크게 좋은 꼴도 못 보고 살아왔는데, 가시는 길이나마 편안하게 갈 수 있어야 하는데. 엄마와 나는 그게 너무나 안쓰러웠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나는 엄마에게 주었던 내 돈을 잊어버린지 꽤 되었다. 마음이 편했다. 처음에 빌려주었다고 생각했을때는 언제나 돌려줄런지 생각하면서 다급해지고 초조해지곤 했었는데. 다시 처음부터 시작했더니 마음이 훨씬 가벼워졌다. 애초에 세웠던 계획을 수정하면서 예상이 빗나가긴 했지만 나는 아직 시간이 많다고 생각했더니 마음이 정말로 가벼웠다. 우리집에 놀러왔던 사촌동생이 내 피아노에 관심을 크게 가지기에 적당한 값에 넘겨버렸다. 밤늦게까지 한참 가지고 놀던 느드슬도 친구에게 적당한 가격에 넘겨버렸다. 사실 이 두 물건은 돈 때문에 처분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막상 통장에 돈이 들어오는 모습을 들여보니 안심이 되더라. 그리고 엄마가 소개시켜 준 아르바이트. 큰 돈을 버는 건 아니지만 그 돈으로 지금 듣고 있는 영어 회화 수업 비용도 내고 있고 남는 건 통장에 꾹 눌러담았다. 그리고 오늘, 내 통장 잔고엔 백삼십 정도의 금액이 찍혔다. 몹시 기뻤다. 사실 백오십 정도의 돈이 모였지만 동생 군대 가시기 전에 쓰실 돈을 좀 마련해주라고 엄마가 귀뜸을 했기에 엊저녁 십만원을 바로 동생 계좌로 날려보냈다. 그 돈 맘만 먹으면 쓰는 거 순식간이라는 동생님의 말씀이 좀 가슴 철렁하게 들리긴 했지만... 그리고 어제, 베스트 프렌드 중 한 명에게서 갑작스러운 전화를 받았다. 급전이 필요하다고. 종종 돈이 필요하면 연락을 하곤 한다. 나는 항상 돈을 빌려주는 쪽이다. 남들이 보면 뭔가 이상해보일지 몰라도 우리 사이엔 이게 몹시도 자연스럽다. 분명 몹시 친한 친구지만 돈을 앞에 두면 우린 언제나 남처럼 행동한다. 얼마가 필요하냐. 언제까지 갚을것이냐. 이자는 넣을것이냐, 말것이냐. 물론 나는 이자를 받기 싫지만 친구는 꼭 넣어야겠다고 한다. 그래서 이자를 넣어주는 날엔 노래방을 쏘거나 밥을 사곤 한다. 그놈도 그걸 아니까 이자를 웃으면서 넣어준다. 쿄쿄쿄. 아무튼, 사야할 물건이 있는데 당장은 집안이 어려워 자금 융통이 어렵다는 친구에게 그자리에서 십오만원을 날려보냈다. 빠르면 이번 달 말, 늦으면 다음달까지 갚겠다는 친구. 자기도 매달 꾸준히 돈이 들어오니 필요하면 융통하라는 문자에 그만 웃어버렸다. 말 안해도 알았겠지만 이렇게까지 마음을 쓰면 그 마음 받는 입장에선 웃음만 나온다. 서로 다 아니까. Anyway, 이번 주. 피아노 대금도 들어왔고 오늘은 알바 월급도 들어왔다. 마음이 풍성해졌다.
아침. 즐거운 영어 회화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엄마랑 둘이서 수다를 떨었다. 할머니의 근황. 집안 사정. 우리 집 돈의 흐름. 동생. 아버지 이야기. 이러저러한 주제로 한숨도 팍팍 쉬고 소리도 팍팍 질러가면서 엄마랑 수다를 떨고 있던 중, 엄마가 느닷없이 말했다. 얼른 돈이 들어와야 할텐데. 요즘 나가는 돈만 잔뜩 있다고. 그래도 조만간 돈이 들어오면 백만원 정도라도 우선 내 계좌에 넣어주겠다는 엄마의 말. 마음대로 하라고 말은 했지만 사실 마음이 쓰렸다. 필요없다고 말했다면 엄마 마음이 얼마나 쓰릴까. 그걸 아니까 마음대로 하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오히려 이쪽에서 더 내놓고 싶은데.
오늘, 가진 돈은 얼마 없지만 이미 내 마음은 이미 충분히 가득 차 있다. 나는 충분히 행복하고 여유롭다. 음하하하핫.
덧. 쓰다보니 뒤늦게야 깨달았지만 고칠 수 없었다. 오늘 글의 주제는 이게 아니었는데... ㅠ_ㅠ
# by | 2007/11/13 22:58 | 『하루를 끝내며』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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